코난
누구도 BBC 방송국에서 표준을 만든 스피커 설계가 수십 년이지나 21세기까지 이어져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BBC 모니터는 방송국 모니터의 표준으로 그 가치를 홈 스피커 시장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KEF, 스펜더보다 한 발 늦게 이 분야에 발을 들였지만 더들리 헤어우드가 설립한 하베스는 앨런 쇼가 바통을 이어받으며 더욱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모니터 시리즈는 모니터 40.1, 30.1 등 0.1 버전으로 오면서 모니터 스피커라는 협소한 바운더리를 넘어서고 있는 모습이다.
그 중 모니터 30.1 은 모니터 40.1에 비해 작아 국내 가정환경에도 전천후로 대응할 수 있는 모델이다. 게다가 이번 시청한 영국 스피커들 중에서도 탄노이와 함께 고전적인 영국풍 스타일이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스피커다. 이런 박스형 모니터 스피커의 기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BBC 모니터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는데 문제는 지금 이 시대에 이러한 설계, 음질이 유효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답을 하라면 분명 “YES” 다. 그 기원은 LS 5/8이지만 당시의 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부분 변모했다.
스피커 제작자로서 더 좋은 음질을 얻기 위해 더 패셔너블한 디자인, 음향적으로 더 쉽게 더 좋은 음질을 낼 수 있는 유닛을 사용할 수도 있다. 소재는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고 음향 관련 이론과 기술의 발전으로 작은 체구에 초저역, 초고역 재생도 구현이 가능하다. 그러나 하베스는 그런 방식을 쫒지 않았다. 그보다 오래된 와인처럼 그 고풍스러운 고유의 디자인과 전통적 설계에 대한 가치를 더 높은 위치에 두었다. 더불어 얇은 캐비닛과 통울림에 대해 더 면밀히 연구했다. 이제는 유닛도 RADIAL 이라는 드라이버를 직접 생산한다.
시대의 조류에 따라가지 못하면서 몰락한 오디오 메이커들처럼 분주하게 트렌드만 쫒아가지 않았다. 가장 늦게 디지털 시대에 합류한 라이카지만 그들은 여전히 건재하며 여전히 명품으로 평가받는다. 단지 시대의 흐름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선도하며 이젠 클래식 명품이 된 라이카. 하베스는 그런 라이카를 닮았다.
Livingston Taylor - Isn't She Lovely
따라서 디자인만 보고 저해상도에 어둡고 불분명한 소리를 연상한다면 곤란하다.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했지만 소리는 최신 기술을 접목한 스피커보다 멋지며 매력적이다. 특히 모니터 시리즈의 0.1 버전이 이룩한 개선은 탁월하다. 리빙스턴 테일러의 ‘Isn't she lovely’(24bit/96kHz, Flac)를 듣다보면 무릎을 치게 만든다. 그릴을 입힌 채로 테스트했고 매칭 앰프는 다소 현대적인 광대역 앰프와 DAC 들이다. 모니터 40.1을 상당히 많이 다운사이징한 체급의 모니터 30.1이나 그 퍼포먼스는 여전히 남다른 브리티시 사운드를 선보인다. 체급이 작아졌기 때문에 움직임은 덜 역동적이지만 음표의 움직임이 가뿐하고 민첩하다. 한 발짝 한 발짝 똑바로 반듯하게 걸어 나가는 균형감 넘치는 밸런스, 가청 대역 한도에서 더 발랄 나위 없는 해상력과 명징한 윤곽감은 역시 모니터 출신답다. 불셀프의 간결함과 부담 없는 편안함이 귀에 깨끗하게 감겨 들어온다. 적당히 풍부한 잔향은 청감을 즐겁게 간질이며 중역 남성 보컬의 감칠 맛 나는 농밀함, 따스함이 음질이 아닌 음악을 듣게 만든다.
Diana Krall - The Girl In The Other Room
다이애나 크롤의 ‘Temptation’(24bit/96kHz, Flac)에서 들려오는 중역대역 움직임은 기음이 명확하고 텐션감이 음악을 싱싱하게 만든다. 물론 +/-3dB 조건에서 저역이 50hZ 로 딥 베이스 대역은 감쇄가 크기 때문에 이는 감안해야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중역이다. 중역이 충실하지 못하다면 나머지 대역이 아무리 뛰어나도 무주공산이다. 모니터 30.1에서 탄력감 넘치는 중역은 보컬을 더욱 살아 꿈틀거리게 만들고 기타는 더욱 호소력 짖게 앞으로 나오게 만든다. 다소 두께감이 충분하고 탄탄한 덕에 리듬 파트에서 장점이 더욱 빛난다. 묵직하고 밀도가 적당한 중, 저역 대역은 그러나 이음매가 자연스럽고 잔향을 동반하므로 따스한 온도감이 스며들어 있어 음악감상의 피로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Suoyen Kim & Donghyek Lim - Allegro Moderato
Suyoen Kim & Donghyek Lim - Schubert For Two
임동혁과 김수연의 슈베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 D.574 - I. Allegro moderato’(24bit/96kHz, Flac)에서 피아노는 커다란 호수라기보다는 작은 개울가를 노니는 듯 아기자기하며 순진무구한 느낌을 준다. 바이올린은 저녁노을 지는 산을 등지며 귀가하는 어느 늦가을 풍경을 연상시킨다. 하루가 저무는 목가적인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지나친다. 텍스처 자체에 나무의 울림이 만들어내는 잔향이 켜켜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속이 텅 비어있었다면 그 울림이 공허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울림은 진솔하며 농밀하고 담백하다.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LP를 듣는 듯 꾸밈없고 수수한 느낌은 요즘 현대 사회를 사는 지친 현대인들의 청감을 힐링한다. 고역이 좀 더 끝없이 뻗었으면 또는 저역이 좀 더 깊고 타이트했으면 하는 등의 바람은 음악의 울림에 묻혀 잊어버리기 일쑤다.
Lucerne Festival Orchestra - Bruckner Symphony No.9
아바도가 지휘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브루크너 교향곡 9번 2악장 ‘Scherzo’(24bit/48kHz, Flac) 에서는 대편성이라는 형식적 제약 덕분에 풀 바디로 구동되더라도 약점이 있다. 저역이 50Hz 이하에서는 급격히 dB 감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깊고 묵직하며 풍부한 양감을 동반한 플로어스탠딩급 저역은 아쉬울 수 있다. 대신 풍선효과처럼 그 나머지 대역, 즉 음악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역과 고역에 집중하게 만든다. 특히 중고역이 대부분 만들어내는 스테이징 부분에서는 구형에서 상당히 많은 발전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공간에서 동일한 매칭으로 들었던 탄노이처럼 하베스 또한 고해상도 HD 음원 재생에도 전혀 부대낌이 없다. 이번 매칭으로 하베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해상력과 다이내믹레인지, 정위감 등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6옴에 85dB 로 저역 드라이빙 자체가 쉽진 않기 때문에 전원부가 충실한 앰프가 요구되지만 너무 빽빽하고 건조할 수 있기 때문에 잔향 특성도 뛰어난 앰프가 제격이다.
오승영
모니터 40 이 BBC의 LS5/8을 계승한 데 비해서 모니터 30 은 LS5/9의 후계기가 된다. 제품간 시차가 있지만 완성도 높았던 오리지널 제품을 버전별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현존 BBC 관련 인물들 중에서 오리지널 기들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최적의 브랜드라는 점에서 하베스의 모니터 제품들은 대내외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모니터 40에서 40.1로의 업그레이드 작업은 모니터 30에게 그대로 낙수효과가 되어 0.1의 숫자가 무색한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자사제작 폴리프로필렌 재질의 미드베이스는 보다 타이트하고 파워풀한 핸들링이 가능한 래디얼 2로 업그레이드되었고, 시어즈사에서 외주제작하는 트위터 또한 그릴 눈이 큰 업버전으로 교체되었다. 유닛 전체가 변경된 드라이버를 콘트롤하는 크로스오버 또한 새롭게 설계되었다. 바인딩 포스트도 싱글와이어링으로 바뀌었다.
30.1은 기본적으로 니어필드를 염두에 둔 사이즈와 컨셉으로 개발되었는데, 광대역 재생이 가능한 2웨이로 제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이즈로 파악된다. 40.1과 비교를 해보면 40.1의 30%가 채 되지 않는 용적으로 40.1 전체 범위의 80%가 넘는 대역을 재생할 수 있다. 처음부터 본 제품들의 개발 컨셉이 ‘가정용 모니터’였던 만큼 기존 컴팩트 시리즈와 PA전용 제품들의 중간을 지향해서 제작되었다. 이에 따라 인테리어적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녹음 소스의 음색과 품질에 최대한 근접한 재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유일한 스탠드거치형이기도 하고 시청했던 다른 다섯 기종과 몇 가지 면에서 그룹으로 묶이기 어색한 제품이지만 제품의 퍼포먼스와 사운드품질은 다른 톨보이제품들을 위협할 만한 수준이었다. 넓은 공간에서 왜소한 느낌을 준다거나 니어필드에 한정된 사운드성향을 보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이에 따라 40.1에서 우퍼를 제거하고 인클로저를 축소한 단편적 하위제품으로서의 개념과는 다르게 간혹 40.1이 구사하지 못하는 영역에까지 ‘열연’을 펼칠 수도 있는 제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공간의 크기로 인한 제약으로 40.1이 완벽하게 구현 못한 스테이징과 포커싱 등은 30.1에서 더 우세할 수도 있어 보였다. 다만, 이 스피커의 사용자로서는 40.1 과는 조금 방향이 다른 드라이브가 필요하다는 점을 참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음압이 상당히 낮은 편이라서 래디얼 2의 퍼포먼스를 풀스윙으로 이끌어내려면 드라이브 특성이 좋은 앰프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음색적인 면에서 30.1은 기본적으로 모니터의 스타일이 잘 드러난다. 뭔가 보정을 하려 하지 않고 녹음의 품질과 스타일을 그대로 들려주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종종 브랜드 타이틀에서 떠오르는 화사한 음색과 매끈하고 윤기있는 질감은 컬러레이션이 개입되지 않는 한도내에서 그대로 살아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내용이다.
Livingston Taylor - Isn't She Lovely
‘Isn’t She Lovely’의 휘파람소리는 앞서 시청한 탄노이 켄싱턴의 스타일과 상당히 유사하다. 색채감이나 윤색의 느낌이 적고 섬세한 동작으로 밝고 맑게 울린다. 다만 탄노이보다 투명한 레이어링 구성이 돋보여서 북쉘프의 장점을 잘 부각시킨다. 스테이징의 묘사가 정밀하기도 하거니와 무대의 크기가 충분히 넓게 그려져서 사실적인 무대를 자연스럽게 떠올려준다. 베이스의 양감이나 파워핸들링은 다소 온건한 편이지만 이 심플한 곡에서 뭔가 강한 에너지가 꿈틀댈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 의식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Diana Krall - The Girl In The Other Room
‘Temptation’에서의 중량감은 탄노이와 비교해서는 다소 덜 육중하게 느껴지지만, 이 곡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정확한 에너지 만큼의 임팩트가 있고 보컬 특유의 육감적인 볼륨이 순간 순간 느껴진다. 이 곡 또한 예외없이 맑고 투명한 프레즌테이션을 펼친다. 세부묘사에 치우치지 않고 보컬의 자연스러운 외곽선으로 전후간 레이어링을 섬세하게 늘어세운다. 특히 동작의 변화포착은 지금까지 가장 좋았던 윌슨 베네쉬에 필적하는 정밀함이 느껴진다. 스피디하고 울림이 적은 정확한 어쿠스틱과 위상 특성으로 약간의 콘트라스트가 더해져도 좋을 만큼 청순한 음색을 그대로 들려준다.
Suoyen Kim & Donghyek Lim - Allegro Moderato
Suyoen Kim & Donghyek Lim - Schubert For Two
슈베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에서의 바이올린은 30.1의 모니터로서의 품질에 하베스만의 스타일이 알맞은 비율로 섞여 있다. 기본적으로 보정하지 않은 싱싱하고 청순한 음색의 자연스러움이 돋보인다. 동작의 묘사가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모니터의 정보량을 빠뜨리지 않으면서 동작의 이동간 대비가 적은 자연스러운 어쿠스틱으로 정확한 음색을 들려주고 있다. 선명하고 명쾌하게 귀에 들어오는 피아노 또한 과장된 하모닉스의 인상이 적어서 정확한 음조로 서포트되는 느낌이 좋다. 유효주파수로 50Hz까지 동작하는 본 제품의 저역한계는 스펙에 비해 여유가 있어 보인다. 피아노를 시청해보니 상당히 극명하게 나타나는 편으로서 왼 손의 대역에 부족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거의 없이 넓은 대역에 걸쳐서 감지된다. 독주 피아노가 아님에도 하베스의 피아노소리에 대해 새삼 의식하게 되었다. 바이올린 못지 않게 말쑥하고 존재감이 분명한 피아노의 어쿠스틱 또한 일품이었다.
Lucerne Festival Orchestra - Bruckner Symphony No.9
브루크너는 울림의 느낌이 앞서 시청한 제품들과 다소 다르다. 말쑥해져 있다고나 할까? 총주시에도 잘 정돈되어 귀에 들어오는 악기별 해상력은 전체 시청기들 중에서 선두를 다툴 만큼 뛰어난 분해력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앞서 시청한 톨보이들에서 다이나믹스를 축소하지 않으면서 일반적으로 연주를 선명하게 느껴지게 하는 정확한 어쿠스틱을 들려준다. 팀파니의 연타 부분에서도 강렬하고 여유있으며 현악합주의 유연함이 빠른 속도에서도 매끄러운 동작으로 느껴진다. 인위적인 윤색과 과장된 울림이 통제된 채로 전체적인 분위기가 안정적이고 아름답게 들린다.